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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통신 : 우편, 전쟁 통신 방법, 변화

by a-historical 2025. 3. 15.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소식을 주고받았을까?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몇 초 만에 메시지를 보낼 수 있지만, 불과 몇백 년 전만 해도 편지 한 통을 보내려면 몇 달이 걸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심지어 ‘소식을 전해주는 행운의 비둘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둘기를 이용해 편지를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전쟁이나 위급한 상황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소식을 전했을까?

이제부터 한국 역사 속에서 편지와 통신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살펴보자.

비둘기는 진짜 편지를 전했을까?

 

‘행운의 비둘기’라는 말처럼, 비둘기는 옛날부터 소식을 전하는 새로 유명했다. 실제로 서양에서는 전쟁 중에 비둘기를 이용해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그랬을까?

한국 역사에서 비둘기를 이용한 기록은 많지 않다. 고려나 조선 시대에 비둘기를 훈련시켜 사용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거의 없다. 대신 중국에서는 비둘기를 이용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일부 사람들이 시도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말이나 사람을 이용한 우편 시스템이 더 발달했다.

비둘기가 아닌 다른 동물을 이용한 사례는 있다. 조선 시대에는 말을 이용한 파발(擺撥) 제도가 있었다. 파발은 긴급한 소식을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 말을 타고 교대로 달리는 방식이었다. 현대의 택배 시스템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즉, 한국에서는 비둘기보다는 말을 이용한 통신 수단이 더 중요하게 쓰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통신 시스템인 편지의 모습

조선 시대의 편지와 우편 시스템

조선 시대에는 공식적인 문서를 전달하는 역참제(驛站制)가 있었다. 쉽게 말하면, 지금의 우체국과 같은 시스템이다. 전국 곳곳에 역(驛)이라는 장소를 만들어서, 관리들이 중요한 문서를 전달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평민들은 이런 공식적인 시스템을 이용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주로 가족이나 친척, 상인들이 여행할 때 편지를 맡겨 전달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당시 편지는 ‘서찰(書札)’이라고 불렸고, 종이에 붓으로 직접 써서 보냈다. 편지에는 보통 건강을 묻는 인사말과 가족의 안부, 중요한 소식 등이 담겼다.

흥미로운 점은, 편지를 쓰는 방식에도 예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왕에게 보내는 편지는 붉은색 글씨로 쓰기도 했고, 가족 간의 편지에는 존칭을 사용해야 했다. 지금처럼 이모티콘을 넣거나, 줄임말을 쓰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속도였다. 편지를 보내면 답장이 오기까지 몇 주, 심하면 몇 달이 걸렸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좀 더 빠르게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기발(騎撥)’이라는 제도가 등장했다. 기발은 파발과 비슷하지만, 말을 타고 달리는 전령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직접 뛰어서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지금 보면 굉장히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꽤 빠른 방식이었다고 한다.

전쟁과 위급 상황에서의 통신 방법

전쟁이나 비상 상황에서는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소식을 전해야 했다. 이럴 때 사용된 방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봉수(烽燧)’였다.

봉수는 신호 연기를 이용해 소식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산 꼭대기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불이나 연기를 피워서 긴급한 상황을 알렸다. 예를 들어, 외적이 쳐들어오면 첫 번째 봉수대에서 연기를 피우고, 이 신호를 본 다음 봉수대가 다시 연기를 올리면서 계속 전달하는 식이다.

연기의 개수에 따라 의미가 달랐다.

연기 1개: 평상시

연기 2개: 적이 국경을 넘었다

연기 3개: 적이 국경을 돌파했다

연기 4개: 적이 성 가까이 왔다

연기 5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하면 단 몇 시간 만에 한반도 끝에서 끝까지 긴급한 소식을 전달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군사 작전에 사용되는 비상 문자 메시지와 비슷한 역할을 한 셈이다.

조선 시대에는 이 봉수 제도를 관리하는 ‘봉수군’이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날씨가 어떻든, 밤이든 낮이든 항상 대기하면서 위급한 상황에 대비했다.

하지만 봉수는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세게 불면 연기가 제대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종종 전달 오류가 발생하기도 했다.

근대화와 함께 변화한 통신

조선 후기가 되면서 서양의 통신 기술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대한제국 시기에는 전신(電信)이 도입되었고, 1885년에는 최초의 전신국이 개설되었다.

이전까지는 사람이 직접 가서 편지를 전달해야 했지만, 전신을 통해 즉시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전신을 운영했던 곳이 바로 한성전보총국이었다. 전보를 보내려면 일정한 요금을 내야 했고, 짧은 문장으로 내용을 전달해야 했다. 지금으로 치면 짧은 문자 메시지와 비슷한 개념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전화도 점점 보급되었다. 물론 일반 서민들이 사용하기는 어려웠지만, 관공서나 기업에서는 전화기를 이용해 소통했다.

해방 이후에는 점점 우편 시스템이 정비되고, 1970년대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전화 보급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통신, 그리고 오늘날

옛날에는 편지를 보내는 것이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종이를 구하고, 붓으로 정성껏 써서,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맡겨야 했다. 비둘기를 이용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대신 말을 타고 달리는 파발이나, 연기로 신호를 보내는 봉수 같은 다양한 방법이 존재했다.

지금 우리는 클릭 한 번이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도 실시간으로 대화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 사람들에게는 편지 한 통도 소중한 소통 수단이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손편지를 받으면 기분이 묘하게 좋아진다. 과거의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먼 길을 돌아온 편지를 받아 들고, 그 안에 담긴 글씨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면서 말이다.

통신 기술이 발전해도, 그 안에 담긴 감정과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 소식을 전하는 힘이 아